우르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존재했던 수메르 문명의 여러 도시 중 하나이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남부 평야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라크의 디 카르 주(Dhi Qar Governorate)의 주도 나시리야(Nasiriyah)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있는 텔 엘 무카이야르(Tell el-Muqayyar)부지에 우르 유적지가 있다.
우르는 약 기원전 3800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26세기부터 도시 국가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달의 신 난나(Nanna)를 주신으로 모셨다.
우르의 역사
설립 시기
기원전 3800년경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작은 정착지로 시작했지만, 점차 발전하여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우르크 시대에 도시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르 제1왕조 (기원전 26세기 ~ 25세기)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에서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2900년경 ~ 기원전 2350년경)라고 부르던 시기에 우르 제1왕조의 통치 아래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우르 외에도 우루크, 라가시, 키시 등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경쟁하며 발전했던 때이다. 우르는 상업과 교역이 번성했으며, 농업과 관개 기술이 발달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수메르 왕 목록’에 따르면 우르 제1왕조의 첫 번째 왕 메스안네파다(Mesannepada)는 우르크 제1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갈키툰을 정복했고, 80년간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르 제3왕조 (우르의 전성기)
우르 제3왕조(기원전 약 2112년 ~ 2004년)는 아카드 제국의 붕괴 이후 혼란과 분열의 시기에 수메르와 아카드를 통합한 신 수메르 왕조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수메르 문명의 부흥기였으며, 우르-남무(Ur-Nammu)왕과 우르 제3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인 슐기(Shulgi)왕의 통치 아래 번영했다.
이 시기 동안 우르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심지로 번영했다. 이 시기에 지구라트가 건설되었다.
주요 왕과 업적
우르-남무(Ur-Nammu)
■ 통치 기간: 기원전 2112년 ~ 2094년
■ 주요 업적: 우르-남무는 우르 제3왕조를 창설하였으며, 수메르와 아카드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 중 하나인 ‘우르-남무 법전(Code of Ur-Nammu)’을 제정했다.
슐기(Shulgi)
■ 통치 기간: 기원전 2094년 ~ 2046년
■ 주요 업적: 슐기는 우르 제3왕조를 더욱 강화하고 중앙집권화했다. 행정 절차를 표준화하고, 세금 제도와 국가 달력을 정립했으며, 종교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했다. 또한, 엘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수사를 포함한 주변 지역을 정복했다.
아마르-신(Amar-Sin), 슈-신(Shu-Sin), 이비-신(Ibbi-Sin)
■ 통치 기간: 아마르-신(기원전 2046년 ~ 2037년), 슈-신(기원전 2037년 ~ 2028년), 이비-신(기원전 2028년 ~ 2004년)
■ 주요 업적: 우르 제3왕조의 말기 왕들로, 마지막 이비-신의 통치 기간 동안 엘람의 침공과 내부 반란으로 인해 왕조가 쇠퇴하게 되었다.
주요 건축물과 문화적 기여
달의 신 난나에게 헌정된 지구라트
우르-남무와 슐기에 의해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건축물 중 하나로, 도시의 중심에서 종교 의식이 행해졌다.
경제적 번영과 교역
우르 제3왕조는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광범위한 관개 시스템과 삼작 윤작제를 도입했다. 이 시기에 금, 은, 구리, 청동 코일이 초기 화폐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행정 및 법률 제도
우르-남무 법전은 정의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법률 제도의 기초를 형성했다. 또한, 각 지방을 관리하는 총독(Ensi)과 외교를 담당하는 수칼마흐(Sukkalmah) 등의 행정관직이 도입되었다.
이후 역사
우르는 여러 번의 정복과 재건을 겪으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엘람인에 의한 점령
기원전 2004년경, 엘람 왕국이 우르 제3왕조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엘람의 침략은 우르의 정치적 권력을 무너뜨렸고, 많은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게 만들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지배
우르는 이후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으며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갔다. 특히 바빌로니아 제국의 함무라비 왕(기원전 1792-1750)의 통치 하에서 우르는 바빌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도시로 전락하였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보니두스 왕의 재건
기원전 6세기경 신 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Nabonidus)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나보니두스 왕은 지구라트뿐만 아니라 우르 시 전체의 복원에도 관심을 가졌다. 도시의 주요 건축물과 인프라를 복원하고 보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나보니두스는 도시의 방어 시설을 강화하고, 사원과 공공 건물을 재건하여 우르를 다시금 번영하는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페르시아 제국과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우르는 페르시아 통치 하에서 쇠퇴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 제국 시대에도 우르는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고, 도시는 점차 폐허가 되었다.
최종 소멸
우르는 결국 서기 4세기경 완전히 소멸하였다. 마지막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고, 남은 건축물들은 자연적으로 붕괴되거나 모래에 묻혀 버렸다.
우르의 유적지
오늘날 우르의 유적지는 이라크의 나시리야(Nasiriyah) 근처의 알-무카이야르(Al-Muqayyar)에 위치해 있다. 우르의 지구라트는 가장 잘 보존된 유적 중 하나로, 관광객들이 자주 방문하는 명소이다.
우르의 지구라트 (Ziggurat of Ur)
건설 시기와 목적
건설 시기
우르의 지구라트는 기원전 21세기경, 우르 제3왕조의 왕 우르-남무(Ur-Nammu)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 후, 그의 아들 슐기(Shulgi)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알려졌다.
목적
이 지구라트는 달의 신 난나를 기리기 위한 신전으로, 종교적 의식과 제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정치적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구조와 특징
■ 계단식 구조: 지구라트는 여러 층의 계단식 테라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상부에는 난나 신을 모시는 신전이 위치해 있었으며, 신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구라트의 기초는 넓고 견고하게 설계되어 구조물 전체를 지지하였다.
■ 재료: 지구라트의 벽돌은 진흙을 굳혀서 만든 것이며, 벽돌 사이에는 아스팔트를 이용해 결합했다. 이 기술은 당시의 건축 기술 중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외부는 때때로 화려한 색으로 장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규모: 지구라트의 기초는 약 64m x 46m 크기로, 높이는 약 30m에 달했다. 원래는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 변천
초기 건설과 첫 번째 붕괴
우르 제3왕조 시기에 건설 된 이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자연적인 침식과 구조적인 약화로 인해 지구라트는 점차 붕괴되기 시작했다.
나보니두스 왕에 의한 재건
기원전 6세기경,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보니두스 왕이 지구라트를 재건하였다. 나보니두스는 고대 유적과 종교적 건축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왕으로, 지구라트의 원래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는 붕괴된 구조물을 보수하고, 추가적인 건축 자재를 사용하여 지구라트를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구라트의 상부 신전을 복원하고, 전체 구조를 안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페르시아 제국 시기
나보니두스의 재건 이후, 우르의 지구라트는 다시 한 번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그러나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지구라트는 점차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고, 유지 보수도 점차 소홀해졌다. 이로 인해 지구라트는 다시 한번 붕괴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발굴과 복원
초기 발굴 작업
1920년대에 영국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가 우르를 발굴하면서, 이 고대 도시의 중요성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울리와 그의 팀은 지구라트, 왕립 묘지 등 여러 유적을 발굴하며, 우르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였다.
사담 후세인의 복원 작업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당시 이라크의 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은 우르의 지구라트를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사담 후세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산을 되살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복원 작업을 지시했다.
사담 후세인의 복원 작업은 주로 현대의 건축 자재와 기술을 사용하여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구라트의 원래 설계를 최대한 재현하려고 노력했으나, 현대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복원 작업에는 많은 노동자와 자원이 투입되었다.
종교적 중요성
우르의 지구라트는 수메르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 중 하나였다. 달의 신 난나를 기리는 신전으로서, 종교적 의식과 제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고대 수메르인들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의 우르의 지구라트
오늘날 우르의 지구라트는 이라크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로, 고대 수메르 문명의 유산을 잘 보여준다. 이 유적지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많은 학자들과 관광객들에게 중요한 연구 및 교육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우르의 왕립 묘지 (Royal Cemetery of Ur)
발견과 발굴
우르의 왕립 묘지는 1922년에서 1934년 사이에 영국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에 의해 발굴되었다. 울리와 그의 팀은 약 1,800개의 무덤을 발견했으며, 그 중 왕족과 귀족의 무덤은 특히 주목받았다. 이 유적지는 수메르 문명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관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묘지의 구조와 유물
무덤의 구조
왕립 묘지는 주로 두 가지 형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매장지로, 석관이나 목관에 시신을 매장한 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왕족의 무덤이다. 이 왕족의 무덤은 계단형 피라미드인 지구라트(Ziggurat)와 연결되어 있다.
주요 유물
우르의 왕립 묘지에서는 금, 은, 청동 등의 귀금속으로 제작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유명한 유물로는 ‘우르의 깃발(우르의 스탠다드(Standard of Ur)’이 있다. 이는 전쟁과 평화의 장면을 묘사한 모자이크 장식판으로, 당시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우르의 황금투구(Golden Helmet of Ur)’와 같은 정교한 금속 공예품들도 다수 발견되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보석, 장신구, 도자기 등이 발견되어 당시 사회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고 있다.
사회적 및 종교적 의미
사회 계층과 매장 관습
우르의 왕립 묘지는 당시 수메르 사회의 계층 구조를 잘 보여준다. 왕족과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유물과 함께 매장되었으며, 많은 경우 하인들도 함께 매장되었다. 이는 죽은 자가 사후 세계에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가길 바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교적 의식
묘지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무덤 구조는 당시 수메르인의 종교적 신념과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과 관련된 다양한 의식 도구와 상징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의식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안전하게 사후 세계로 이동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