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심왕(사자왕)리처드 1세는 가장 유명한 중세 잉글랜드 왕 중 한 명이다.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 살라딘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렸다.
이 십자군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사자심왕(Richard the Lionheart)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Lionheart’는 문자 그대로 ‘사자심장’을 의미하는데, 십자군 전쟁 당시 용맹한 모습으로 인해 붙여진 별명이다. 간단히 사자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처드 1세의 동생 존 왕은 중세 유럽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 중 하나인 ‘마그나 카르타 서명’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또한 리처드 1세나 존 왕은 ‘로빈 훗’이나 ‘아이반호’ 같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잉글랜드 왕이다.
사자심왕(사자왕) 리처드 1세 개요
출생과 가정 배경
리처드 1세는 1157년 9월 8일, 옥스퍼드의 보몽 궁(Beaumont Palace)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헨리 2세(Henry II)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이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영지인 아키텐의 여공작이었다.
헨리는 첫째, 제프리는 둘째, 리처드는 셋째, 존은 막내로 태어났다.
리처드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 훈련을 받으며 자랐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다. 아키텐 공작으로서 남부 프랑스를 통치했다.
왕위와 통치
리처드 1세는 1189년 헨리 2세의 사망 후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재위 기간은 1189년부터 1199년까지이다. 리처드 1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일원이다.
통치 기간 대부분 십자군 전쟁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잉글랜드 외부에서 보냈다.
제3차 십자군 전쟁
1187년 예루살렘이 이슬람군에게 함락된 후 성지를 되찾기 위해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됐는데, 리처드 1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세 번째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성지로 떠났다.
리처드 1세는 아크레 전투(1191), 아르수프 전투 (1191), 자파 전투(1192)에서 살라딘과 맞붙어서 승리하며 십자군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용맹함을 발휘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지는 못했으며, 대신 살라딘과의 협상을 통해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포로 생활
리처드 1세는 1192년 12월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사로잡혔다. 1193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져 1194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프랑스와의 전쟁과 사망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왕 필립 2세(존엄왕)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다. 리처드 1세가 포로로 잡힌 동안, 필립 2세는 프랑스에 있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영지를 공격했다.
1194년 리처드 1세는 석방된 후, 잉글랜드로 돌아와 왕권을 재정립하고, 필립 2세와의 전쟁을 재개하였다.
리처드 1세는 1199년 샬뤼 성 포위전에서 화살에 어깨를 맞고 부상을 당해 4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리처드 1세는 사망 후 퐁트브로 대수도원 (Fontevraud Abbey)에 안치되었으며, 심장은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에 보존되었다.
리처드 1세의 즉위 전 상황
헨리 2세와 아들들의 갈등
헨리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 내부의 불화로 많은 분란이 일어났다. 헨리 2세의 네 아들(헨리, 제프리, 리처드, 존)이 상속 문제로 반란을 일으키며, 부자 및 형제 간에 전쟁이 발생했다. 헨리 2세는 영지를 아들들에게 나누어주면서도 최종 권력은 자신이 쥐고 있었고,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헨리 2세는 맏아들 헨리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고도 실권을 내놓지 않아서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로 만들었다. 1173년에는 제프리의 영지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아들 존에게 주려 하자 이 사실을 알게된 제프리가 등을 돌렸다.
또한 왕비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 소원해지자, 아들 리처드를 부추겨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 헨리 2세의 아들들의 반란에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의 지원, 그리고 많은 봉건 영주들의 지지도 함께 얽혀 있었다. 1174년, 헨리 2세는 모든 것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캔터베리에서 공개적으로 참회했다.
헨리 2세의 캔터베리 참회 이후 반란은 진압 되었고, 아들들은 사면을 내렸지만, 왕비 엘레오노르만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감금시켜 놓았다.
계속된 갈등과 반란
1181년, 청년 왕 헨리와 리처드는 어머니의 영지인 아키텐을 두고 싸웠다. 아키텐은 리처드의 영지였고, 푸아티와 가스코뉴의 반항적인 귀족들을 다루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가스코뉴 사람들은 헨리와 제프리에게 도움을 청해 리처드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2세는 리처드를 지원하여 반란을 진압했지만, 장남 헨리와 제프리가 사망하면서 리처드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앙주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막내 존은 리처드의 소유인 아키텐을 요구하며 갈등이 계속되었다. 헨리 2세는 존의 편을 들었고, 리처드는 아버지에게 반발했다.
헨리 2세의 사망과 리처드 1세의 즉위
1188년,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립 2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며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헨리 2세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헨리 2세는 르망에서 소뮈르까지 추격당하며 패배했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막내 존은 리처드와 손을 잡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 아들 존이 리처드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이기지 못한 헨리 2세는 1189년 사망했고, 리처드는 왕으로 즉위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 앞장선 리처드 1세
리처드 1세는 즉위 하자마자 1190년에 곧바로 십자군 전쟁 원정길에 올랐다. 프랑스의 필립 2세와 함께 1191년 아크레에 도착해 십자군의 포위를 지원하며 승리했다. 이 전투 후 필립 2세는 병을 핑계로 귀국했다.
필립 2세가 빠진 아르수프와 자파 전투에서도 리처드 1세는 살라딘의 군대를 물리치고 십자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리처드 1세는 이후 십자군 내부의 분란과 살라딘의 공세로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했다.
리처드 1세에게 필립 2세의 침공 소식이 전해졌고, 1192년 리처드 1세는 대치 하고 있던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십자군이 아크레와 좁은 해안 지역을 계속 보유하고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성지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협정이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은 휴전 협정 후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끝나게 되었다.
존의 배신과 리처드 1세의 용서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존은 잉글랜드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1192년 리처드 1세가 십자군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억류되었고, 이 기간 동안 존은 필립 2세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 1세의 왕위를 빼앗으려고 했다.
1194년 2월 리처드 1세는 막대한 몸값과 함께 석방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자신의 왕권을 재정립하고자 4월 17일에 다시 한번 대관식을 진행했다.
존은 왕좌를 얻기 위해 기울인 많은 노력이 모두 무산되고 잉글랜드에서 추방되고 말았는데, 얼마 후 리처드 1세는 존을 용서하고 일부 영지도 되돌려주었다.
리처드 1세의 사망 과정과 사후 시신처리
1194년 5월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내 문제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휴버트에게 맡기고 자신은 필립 2세와의 전쟁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1199년 리처드 1세는 프랑스의 리무쟁 지역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라모주 자작의 영지로, 리처드 1세는 이 곳의 한 성을 포위하게 되었는데, 샬뤼-샤브롤 성이다.
리처드 1세는 샬뤼-샤브롤 성을 포위하고 성벽을 순찰하던 중, 석궁병이 쏜 화살에 맞았고 리처드의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당시 의료 기술로는 감염을 막기 어려웠고,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리처드 1세는 부상을 입은 지 열흘 후인 1199년 4월 9일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리처드 1세 사후 시신 처리는 중세의 전통을 따랐으며, 여러 장소에 나누어 안치되었다. 리처드 1세의 심장은 루앙 대성당에, 내장은 샬뤼-샤브롤 성 근처에, 시신은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왕비가 묻혀 있는 퐁트브로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루앙 대성당에서 발견된 심장이 리처드 1세의 심장이라는 근거
역사적 기록
당시 관습
중세 유럽에서는 왕이나 고귀한 인물의 시신을 나누어 여러 장소에 안치하는 관습이 있었다. 리처드 1세의 경우, 심장이 루앙 대성당에 안치되었고, 이는 역사 기록에 잘 문서화되어 있다.
문서 기록
여러 역사적 문서와 연대기에는 리처드 1세의 심장이 루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13세기 연대기 작가들은 리처드 1세의 심장이 루앙에 안치되었음을 명확히 기록했다.
과학적 분석
발견과 분석
1838년 루앙 대성당에서 납으로 된 작은 상자가 발견되었다. 이 상자에는 ‘여기에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의 심장이 있다'(HIC IACET COR RICARDI REGIS ANGLORUM)라는 라틴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2012년, 과학자들은 이 상자 안에 있는 심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분석 결과, 심장은 매우 부패되어 있었지만, 일부 유기물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화학적 분석
과학자들은 심장 조직을 화학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이 중세 시대의 인물의 심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과 같은 현대적 분석 방법은 심장의 연대를 리처드 1세의 시대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냈다.
독성물질 분석
심장 조직에서 검출된 독성 물질은 중세 시대에 방부처리 목적으로 사용된 물질과 일치했다. 이는 심장이 왕이나 귀족과 같은 중요한 인물의 것임을 시사한다.
참고: SCIENCE ON